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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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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1780년 프로이센 왕국에서 태어난 군인이자 군사 이론가이다. 그는 샤른호르스트에게 군사학을 배우고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으며, 러시아군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전쟁론》을 저술하여 전쟁의 본질과 전략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제시했다. 클라우제비츠는 군사적 천재성, 전쟁의 안개, 삼위일체 등 독창적인 개념을 제시했으며, 그의 사상은 현대 군사 전략과 리더십 이론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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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로이센 군 복무 중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1830년대 초 빌헬름 바흐 초상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프로이센 군 복무 중; 1830년대 초 빌헬름 바흐 초상화
본명카를 필리프 고트프리트 폰 클라우제비츠
출생일1780년 6월 1일
출생지부르크 바이 마그데부르크, 프로이센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사망일1831년 11월 16일
사망지브레슬라우, 슐레지엔 주, 프로이센 왕국
국적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1812–1813)
군대프로이센 육군
복무 기간1792–1831
최종 계급소장
부대러시아-독일 군단 (III 군단)
지휘크리크스아카데미
참전 전투프랑스 혁명 전쟁
마인츠 포위전
나폴레옹 전쟁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보로디노 전투
리그니 전투
바브르 전투
배우자마리 폰 브륄 (1810년 결혼)
로마자 표기Kal Pilip Goteupuriteu Pon Keulla-useubiteu
작품
주요 저서전쟁론
참고 자료
참고 웹사이트Clausewitz and His Works
작성자크리스토퍼 배스포드
작성일2016년 3월 8일
인용 서적칼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 1984년, 87쪽

2. 생애

1780년 프로이센 왕국의 부르크바이마그데부르크에서 태어난 클라우제비츠는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 하급 장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795년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샤른호르스트에게 군사학을 배웠고, 1803년 수석으로 졸업했다.[56]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참전했다가 나폴레옹 군대의 포로가 되어 1년간 파리에 억류되었다.[56] 1812년 러시아 원정 당시 프로이센 군대가 나폴레옹의 동맹군으로 참여하자, 이에 반발하여 러시아 군대에 입대하여 보로디노 전투 등에서 나폴레옹 군대와 싸웠다. 1813년 프로이센이 대불동맹에 가담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56]

1815년 워털루 전역리니 전투와 와브르 전투에 참전 후 프로이센 군에 복귀, 1830년까지 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이때 샤른호르스트의 전기, 여러 군사 논문을 저술하고 《전쟁론》 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56]

1831년 유럽콜레라가 유행하자, 콜레라 방지를 위한 위생 경계선 구축을 담당하는 프로이센 군을 지휘했으나, 1831년 11월 16일 자신도 콜레라로 사망했다.[6] 사후 배우자 마리 폰 브뢸이 미완의 《전쟁론》 초고를 보완하여 1832년 출간했다.[56]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780년 프로이센 왕국의 부르크바이마그데부르크에서 중산층 가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가브리엘 클라우제비츠는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 하급 장교였으며, 7년 전쟁 이후 징세관으로 일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1792년 12세의 나이에 포츠담의 페르디난트 왕자 보병연대에 용커로 입대했다.[5] 1795년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대 개혁의 기수였던 샤른호르스트로부터 군사학을 배웠다.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된 해인 1803년 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했다.[56]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당시 1794년 3월 라인란트의 마인츠 공성전에 참전했다. 이때 클라우제비츠는 기수를 맡았으며, 전투는 4월 1일에 시작되어 7월 23일 프랑스군이 항복하기 이틀 전 준사관으로 진급했다.

15세에 소위로 임관한 후 6년간 노이피네에서 복무했다. 연대장 평가표에 따르면 유능하고 열성적이며 명석하고 호기심이 왕성하다고 평가받았다. 1801년 베를린의 사관학교에 입학,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 중령에게 군사학을 배우고 그가 설립한 군사 학회에 가입했다. 이 학회는 논문 심사를 통해 가입이 허락되는 학술 연구 단체였다. 클라우제비츠는 여기서 학술 연구 방식을 익히고, 수학, 논리학, 지리학, 역사학, 문학 등 일반 교양과 군사학 전문 지식을 쌓아 1803년 수석 졸업했다. 졸업 후 샤른호르스트의 추천으로 아우구스트 왕자의 근위 대대 부관으로 근무하며 궁정 사회에 진출했다. 이때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문학,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샤를 드 몽테스키외의 저서, 이마누엘 칸트 철학 강의를 접했으며, 1805년 마리 폰 브뤼울과 약혼했다.

1801년 베를린의 크리그스아카데미(후일 전쟁대학)에 입학하여 임마누엘 칸트,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저술을 공부하고, 샤른호르스트의 주목을 받았다. 클라우제비츠는 헤르만 폰 보이엔, 카를 폰 그롤만과 함께 1807년부터 1814년까지 프로이센 군 개혁에 참여했다.

당시 프로이센은 행정 및 교육 개혁과 더불어 애국적인 국민군 창설을 위한 군제 개혁을 추진했다. 귀족 특권 폐지, 육군대학교 설립 등이 샤른호르스트 주도로 진행되었다. 샤른호르스트는 19권 분량의 군제 개혁안을 통해 인사, 부대 편제, 병역, 장비, 훈련, 교리, 장교 교육, 정비, 국토 방위, 요새 건설 등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1808년부터 1812년까지 프로이센 군의 기간 부대를 육성, 매달 신병 5명을 받아 3개월 훈련 후 귀향시키는 제도로 군사 지식 보급, 군-민 상호 이해 증진, 예비 병력 확보를 꾀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샤른호르스트를 도와 군제 개혁에 힘썼고, 1810년 육군대학교 교관 및 왕세자 군사학 교관으로 임명되어 『왕세자전하어진강록』을 남겼다.

2. 2. 군 복무와 나폴레옹 전쟁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아우구스트 폰 프로이센 장군[57]의 부관으로 참전했으나, 나폴레옹 군대의 포로가 되어 1년 동안 프랑스 파리에 억류되었다.[56] 1806년 10월 14일, 프로이센 군은 나폴레옹 전쟁의 일환인 예나 전투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클라우제비츠의 대대도 이 전투에 참가했으며, 호엔로에 공은 4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프랑스군의 추격으로 포위되어 항복했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가 소속되어 있던 근위대대만은 항복을 거부하고 발트해 연안을 향해 돌파를 시도했다. 양군의 기병 부대가 교전하고 있던 브렌츠라우 마을을 피해 북진하는 중, 마을 근교의 우커 강에서 프랑스군 기병 부대와 접촉하여 방어전을 반복하며 강변 습지대를 이동했지만, 늪지 때문에 부대가 완전히 기동 불능이 되었고, 여기서 지휘관 아우구스트는 항복했다. 1806년 12월, 아우구스트와 함께 클라우제비츠는 프랑스 북동부 낭시에 포로로 수감되었지만, 프랑스어 학습과 파리 관광, 그리고 저술 활동을 할 수 있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의 요구로 프로이센 군대가 동맹군으로 참여하게 되자, 이에 반발하여 탈영하고 러시아 군대에 입대하여 나폴레옹 군대와 대적하였다.[56] 프로이센의 나폴레옹과의 강제 동맹에 반대한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 군을 떠나 1812년부터 1813년까지 러시아 원정 기간 동안 러시아 제국 군대에서 복무하며 보로디노 전투(1812)에 참여했다. 러시아에서 복무하는 많은 프로이센 장교들처럼 그는 1813년에 러시아-독일 군단에 합류했다. 러시아 제국에서 복무하면서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영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의 연합을 위한 길을 열었던 타우로그겐 협약(1812)을 협상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이 연합은 궁극적으로 나폴레옹과 그의 동맹국들을 패배시켰다.[6] 1813년 프로이센 왕국이 대불동맹에 가담하는 계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56]

1812년 2월 24일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자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저술로 정리하여 공표하려 했으나, 그나이제나우의 반대로 단념했다. 이 저술은 국민으로서의 품위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며, 프로이센의 존속을 위해 프랑스와의 동맹은 있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1812년 3월 31일 클라우제비츠는 베를린을 떠나 러시아로 향했다. 4월 18일 사직서도 승인되었고, 브레슬라우(Breslau)를 거쳐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와 타우라게(Tauragė, 타우로겐)를 경유하여 6월 6일 러시아 방위군 사령부가 있던 빌뉴스(Vilna)에 도착했다. 샤른호르스트의 추천서와 이미 러시아군에서 싸우고 있던 그나이제나우 대령, 그리고 러시아 황제의 무관 볼초겐(Volzogen) 중령의 배려로 러시아군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클라우제비츠는 바렌 장군 휘하에서 3주간 참모로 근무했으며, 제1기병군단장 우바로프 장군의 참모차장으로 군수를 담당했다. 러시아군은 보로디노 전투에서 패배한 후 모스크바로 후퇴했고, 9월 14일에는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칼루가로 후퇴했다. 프랑스군은 이러한 scorched earth 전술로 인해 약화되었고, 10월 24일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클라우제비츠가 이 전역에서 비트겐슈타인 군단에 근무하는 동안 마르몽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프로이센 연합군과 러시아군이 대치했다. 12월 26일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군과의 전투를 피하기 위해 러시아군의 군사로서 프로이센군의 요르크 중장을 방문하여 휴전 협상을 진행했다. 요르크를 설득함으로써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 지휘하의 프로이센군을 러시아군이 중립으로 간주하게 하고, 프로이센에서 리투아니아 지역을 중립지대로 설정하여 동프로이센을 러시아군의 점령에서 해방시키는 "타우로겐 협정" 체결에 성공했다. 이 협정은 프로이센 국왕에게 전달되었고, 요르크 중장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할 기회가 왔음을 국왕에게 진언했고, 국왕은 12월 30일 협정을 승인했다.

1815년 러시아-독일 군단은 프로이센 군에 통합되었고 클라우제비츠는 대령으로 프로이센 군에 복귀했다.[9] 그는 곧 요한 폰 틸만(Johann von Thielmann)의 제3군단(III Corps)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815년 워털루 전역(Waterloo campaign)에서 리니 전투(Battle of Ligny)와 와브르 전투(Battle of Wavre)에서 복무했다.

2. 3. 사관학교 교장과 《전쟁론》 집필

1815년 프로이센 왕국으로 귀국한 클라우제비츠는 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샤른호르스트의 전기를 집필하고 여러 독창적인 정치 및 군사 관련 논문들을 저술하였다. 이때 《전쟁론》 집필을 시작하였지만 완성하지 못했다.[56]

1818년 소장으로 승진하여 육군대학교 교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파였던 클라우제비츠에 대해 육군 당국은 그의 권한을 학문적 지도가 아닌 규율 유지에 제한함으로써 견제했다. 이 시기 클라우제비츠는 그나이제나우를 가끔 방문하거나, 베른슈톨프 외무장관의 자택을 방문하는 정도의 제한적인 교류를 가졌다. 프랑스어영어에 능통했던 클라우제비츠는 1821년 영국 런던 근무를 희망했지만, 영국 공사와 국왕에 의해 거절되었다.

이후 7년 동안 클라우제비츠는 부인 마리와 함께 군사학 연구에 전념했다. 마리는 연구에 협력하여 실레지아 요새에 대한 조사에 동행했으며, 떨어져 생활하는 동안 서신을 통해 군사 지식을 쌓고 클라우제비츠의 견해를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마리는 클라우제비츠의 발표물 전부를 깨끗하게 필사하는 작업을 도왔다.[56]

2. 4. 콜레라 사망과 유산

1831년 콜레라가 유행하면서, 클라우제비츠는 대규모 콜레라 발생을 억제하기 위한 위생 경계선(cordon sanitaire) 구축을 담당하는 프로이센 군을 지휘했다.[6] 그러나 클라우제비츠 자신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병으로 1831년 11월 16일 사망했다.[6] 그는 11월 16일 점심시간까지는 평소와 같이 직무를 수행했으나, 오후부터 구토와 경련 등의 증상을 보였고, 척추의 격렬한 통증과 흉부 경련을 보이며 자택에서 급사했다. 마리 부인이 기록한 클라우제비츠의 임종 기록에는 발작적인 신경성 쇼크에 의한 심장 마비가 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클라우제비츠가 사망하자 브레슬라우(Breslau) 주둔지에서 간단한 장례 행렬이 치러졌다. 남편을 잃은 마리 부인은 클라우제비츠 사후 그의 유고를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1832년, 그 유고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장군의 전쟁 및 전쟁 지휘에 관한 유고』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론』은 그 1권부터 3권까지의 내용이다. 마리 부인은 발간에 대한 서문을 썼는데, 거기에는 클라우제비츠가 이 저작이 미완성 상태인 것을 문제 삼았다는 점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출판이 가능했던 것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다. 마리 부인이 1836년 사망할 때까지 7권까지 출판되었고, 나머지는 다음 해에 협력자들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 유고집에는 『전쟁론』뿐만 아니라 전쟁사에 대한 기술과 정치 논문집 등도 포함되어 있다.

3. 군사 사상

클라우제비츠는 수많은 군사 작전에 참여한 베테랑이자 군사 이론가였다.[11] 그는 전쟁론을 통해 전쟁 철학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남겼다. 그의 저술은 프리드리히 2세와 나폴레옹의 전쟁을 참고 자료로 활용했다.[12]

클라우제비츠의 저술은 현대에도 여전히 연구되고 있으며, 19세기의 그의 라이벌 조미니와 달리 지속적인 영향력을 보여준다.[13] 역사가 린 몽트로스는 "조미니가 전쟁 체계를 만들었지만 클라우제비츠는 철학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13]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이중 구조를 밝혔다. 그는 전쟁을 확대된 결투로 보았으며, 폭력에 기반한 상호 작용이 극단화(에스컬레이션)를 가져와 폭력의 극대화 사용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절대 전쟁은 현실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리적 요인에 의해 억제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정치에 종속적이며, "전쟁은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정치의 연장"이라고 말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경향을 규정하는 요인으로 폭력, 불확실성과 개연성, 정치를 위한 수단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제시했다. 이 요소들은 각각 국민, 군대, 정부에 관련되어 있으며, 삼위일체로서 전쟁에 작용한다. 그는 군사 행동에서의 불확실성과 과실의 존재가 전쟁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하고, 지휘관의 결단이 부대의 작전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전자에 대한 지적이 마찰이며, 후자가 군사적 천재의 개념이다. 마찰이란 현실의 전쟁과 이론상의 전쟁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예측 불가능한 장애를 가리킨다.

3. 1. 전쟁의 본질과 목표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철저히 연구한 군사 이론가로, 그의 저서 《전쟁론》은 전쟁 철학에 관한 중요한 저술로 평가받는다. 그는 전쟁의 모든 측면에 대한 체계적이고 철학적인 연구를 수행했으며, 레프 톨스토이와 함께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에 대한 철학적 연구를 진행했다.[13]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정의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의를 제시하고 변증법적으로 비교했다. 그는 "전쟁은 우리의 적에게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기 위한 힘의 행위"라고 정의했으며,[14] 또한 "전쟁은 단지 다른 수단을 사용한 정책의 연속일 뿐"이라고 주장했다.[14] 그는 전쟁의 본질을 "원초적인 폭력, 증오, 적의", "우연과 확률의 놀이", "정책의 도구로서의 종속"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 "매혹적인 삼위일체"로 설명했다.[14] 이는 "폭력적인 감정/우연/합리적인 계산"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14] 흔히 오해되는 "국민/군대/정부" 개념과는 다르다.[15][16]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정치적 교류의 연속이며, 전쟁 자체가 정치적 교류를 중단시키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군사적 사건이 진행되는 주요 방향과 제한되는 방향은 전쟁 내내 이후의 평화로 이어지는 정치적 방향"이라고 말했다.[17]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혼란스러운 혼돈이 아닌, 사회 정치적 현상으로 보았다. 그는 전쟁의 복잡한 본질을 강조하며, 국가 정책의 우선순위를 강조했다.[19] 그는 전쟁을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 현상으로 생각했으며, 군사력은 정책의 목적을 추구하는 도구로 보았다.[20]

클라우제비츠는 방어의 고유한 우월성을 강조했지만, 방어자가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정규군과 민병대 또는 게릴라 부대 간의 협력에 관심을 가졌으며,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국가가 전쟁 수행에 전체 인구를 참여시킬 필요성을 강조했다.[21]

클라우제비츠는 정보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군사 정보는 거짓이거나 불확실하다고 보았다.[18] 그는 이러한 상황을 전쟁의 안개로 설명했으며, 전략적 및 정치적 수준에서 최상의 정보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마찰과 ''전쟁의 안개''가 지휘관의 판단을 방해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군사적 천재성'''(der kriegerische Geniusde) 개념을 발전시켰다.[22]

《전쟁론》의 주요 개념은 다음과 같다.[23]

  • 군사 분석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 방식
  • "비판적 분석" 방법
  • 전쟁에서 정치적 목표와 군사적 목표 간의 관계
  • 공격과 방어 간의 비대칭적 관계
  • "군사적 천재성"의 본질
  • 전쟁의 "매혹적인 삼위일체"(wunderliche Dreifaltigkeit)[24]
  • "절대 전쟁", "이상적 전쟁" 및 "실제 전쟁" 간의 철학적 차이점
  • "실제 전쟁"에서 제한된 목표와 "적을 무력화시키는" 전쟁이라는 두 가지 극점
  • 전쟁과 그 수행은 사회적 영역에 속한다는 개념
  • "전략"과 "전술"
  • "도덕적 힘"의 중요성
  • 전문 군대의 "군사적 미덕"
  • 숫자와 "집중력"의 우위
  • 전쟁의 본질적인 예측 불가능성
  • "전쟁의 안개"
  • 마찰
  • 전략적 및 작전적 "무게중심"
  • 공세의 "절정점"
  • 승리의 "절정점"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이중 구조를 밝혔다. 그는 전쟁을 확대된 결투로 보았으며, 폭력에 기반한 상호 작용이 에스컬레이션을 가져와 폭력의 극대화 사용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절대 전쟁은 현실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리적 요인에 의해 억제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정치에 종속적이며, "전쟁은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정치의 연장"이라고 말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경향을 규정하는 요인으로 폭력, 불확실성과 개연성, 정치를 위한 수단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제시했다. 이 요소들은 각각 국민, 군대, 정부에 관련되어 있으며, 삼위일체로서 전쟁에 작용한다.

3. 2. 전쟁의 변증법적 접근

클라우제비츠는 전쟁 연구에 변증법적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 그는 "전쟁은 우리의 적에게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기 위한 힘의 행위이다"라는 명제와 "전쟁은 단지 다른 수단을 사용한 정책의 연속일 뿐이다"라는 반명제를 제시했다. 이 둘을 종합하여 전쟁을 "원초적인 폭력, 증오, 적의", "우연과 확률의 놀이", "정책의 도구로서의 종속"이라는 "매혹적인 삼위일체"로 정의했다.[14]

클라우제비츠의 분석은 역사적 사례에 기반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관점과 달리 전쟁을 혼란스러운 혼돈이 아닌, 시대의 경제, 기술, 군대의 사회적 특성, 지휘관의 정치와 심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 복잡한 현상으로 보았다.[19] 그는 전쟁을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 현상으로 이해했으며, 군사력은 국가가 자신의 의지를 상대에게 강요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라고 보았다.[20]

클라우제비츠는 방어의 우월성을 강조했지만, 방어자가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21] 그는 정규군과 민병대, 게릴라 부대 간의 협력에 관심을 가졌고, 프랑스 혁명 전쟁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국가가 전쟁에 전체 인구를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21]

그는 정보의 가치를 인식하면서도, 대부분의 군사 정보가 불확실하고 거짓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상황은 전쟁의 안개로 설명되며, 그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결정을 내리는 능력, 즉 '''군사적 천재성'''(der kriegerische Genius|데어 크리거리셰 게니우스de)을 중요하게 생각했다.[22]

젊은 시절의 클라우제비츠

3. 3. 마찰과 군사적 천재성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강조하며, 이를 "마찰"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마찰은 현실의 전쟁과 이론상의 전쟁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우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장애를 의미한다.[23] 예를 들어, "전쟁에서 많은 정보 보고서는 모순되고, 더 많은 것은 거짓이며, 대부분은 불확실하다…요컨대, 대부분의 정보는 거짓이다."[18] 이러한 상황은 전쟁의 안개의 일부로 설명된다.[18]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마찰을 극복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군사적 천재성"(der kriegerische Geniusde)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군사적 천재성은 단순한 지능을 넘어, 지능, 경험, 성격, 기질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고도로 발달된 정신적 능력이다.[22] 이는 위험, 고생,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전쟁에서 적절한 군사 행동을 지휘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주로 정신적인 요소로 구성된다.[22]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과 프리드리히 2세의 전쟁사를 연구하면서, 동일한 군사적 조건에서도 지휘관의 군사적 천재성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다.[11]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의 목표와 수단에 따라 전쟁을 정확하게 조직하는 방법을 아는 군주나 장군은 너무 적게 하거나 너무 많이 하지 않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천재성에 대한 가장 큰 증거를 제시한다."라고 언급했다.[18]

4. 영향

클라우제비츠의 사상은 후대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의 변증법적 방법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다. 베이즐 리델 하트(B. H. Liddell Hart)는 몰트케 장군을 비롯한 프로이센 군부가 클라우제비츠의 사상을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군사 이론과 전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26]

크리스토퍼 배스포드(Christopher Bassford)는 클라우제비츠의 변증법적 제시 방식이 혼란을 야기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전쟁은 다른 수단을 사용한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유명한 구절은 단순한 사실 진술이 아니라, 전쟁이 폭력, 우연, 합리적 계산이 상호작용하는 "매혹적인 삼위일체"라는 복합적인 현상임을 설명하기 위한 변증법적 논증의 일부이다.[6]

클라우제비츠가 총력전을 옹호했다는 주장도 오해이다. 그는 "총력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으며, "절대 전쟁"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논했을 뿐이다. 실제 전쟁에서 군사적 목표는 제한된 목표이거나 적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될 수 있다.[28]

파나기오티스 콘딜리스(Panagiotis Kondylis)는 레이몽 아롱(Raymond Aron) 등의 해석과 달리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에 대해 도덕적으로 무관심했으며, 그의 정치 우선성 주장이 평화주의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피터 파레트(Peter Paret)와 마이클 하워드 경(Sir Michael Howard)은 클라우제비츠 연구에 기여한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존 키건(John Keegan)은 클라우제비츠가 국가 중심적 관점을 가졌다고 비판했다.[29]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클라우제비츠의 "절대 전쟁" 개념에 영향을 받아 핵 억제 전략을 추구했다.[41] 핵확산 이후 클라우제비츠의 개념이 쓸모없다는 주장도 제기되었고,[42]

마르틴 반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는 클라우제비츠의 "삼위일체" 개념이 낡았다고 주장했지만,[44] 배스포드는 이를 오해라고 반박했다.[24]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은 다른 수단을 사용한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논쟁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4. 1. 군사 이론에 대한 영향

클라우제비츠의 사상은 군사 이론에 널리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독일 군사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과 같은 후대의 프로이센과 독일 장군들은 클라우제비츠의 영향을 받아 전쟁에서 우연, 마찰, "안개", 불확실성, 상호 작용의 역할을 강조했다.[30]

클라우제비츠의 영향은 영국에도 미쳤는데, 처음에는 이론가보다는 역사가이자 분석가로서 더 많이 영향을 주었다.[30] 19세기 영국에서는 웰링턴의 1815년 전역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연구가 널리 논의되었다. 클라우제비츠의 사상은 보어 전쟁(1899~1902) 이후 주목받게 되었으며, 스펜서 윌킨슨(Spenser Wilkinson), 해군사가 줄리안 코벳(Julian Corbett) 등이 클라우제비츠의 개념을 연구하고 적용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B. H. 리델 하트(B. H. Liddell Hart)는 클라우제비츠를 "총력전" 교리의 창시자로 잘못 지목하기도 했지만, 최근 학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이 클라우제비츠의 이론과 모순된다고 본다.[31] 오늘날 영향력 있는 영국 클라우제비츠주의자로는 콜린 S. 그레이(Colin S. Gray)와 휴 스트래찬(Hew Strachan)이 있다.

1945년 이전 미국 군사 사상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영향은 제한적이었지만, 아이젠하워와 패튼 장군은 그의 저서를 읽었다. 클라우제비츠는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블라디미르 레닌, 레온 트로츠키,[32] 보 응우옌 겹(Võ Nguyên Giáp),[33]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34] 마오쩌둥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레닌은 클라우제비츠를 "위대한 군사 작가 중 한 명"이라고 칭송하며 그의 사상을 소련 군사 사상의 기초로 삼았다.[36] 러시아 역사가 A.N. 메르찰로프는 "소련에서 클라우제비츠에 대한 태도를 형성한 것은 레닌이었다"고 평가했다.[36]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는 레닌의 접근 방식을 정치가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의 연장이라고 묘사하여 클라우제비츠의 주장을 "뒤집었다."고 평가했다.[30]

마오쩌둥은 1938년에 『전쟁론』을 읽고 연안에서 클라우제비츠 세미나를 조직할 정도로 클라우제비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38] "전쟁의 안개"라는 구절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 중에 얼마나 혼란스러워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한 강조에서 유래한다.[39] 군사적 맥락에서 사용되는 중심이라는 용어는 클라우제비츠가 뉴턴 역학에서 가져온 것이다.[40]

4. 2. 현대적 재해석과 비판

베이즐 리델 하트(B. H. Liddell Hart)는 몰트케 장군과 같은 프로이센 군부가 클라우제비츠의 사상을 오해하여 군사 이론과 전쟁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26] 크리스토퍼 배스포드(Christopher Bassford)는 클라우제비츠의 변증법적 제시 방식이 혼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설명하며, "전쟁은 다른 수단을 사용한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유명한 말은 단순한 사실 진술이 아니라, 전쟁이 폭력적인 감정, 우연, 합리적인 계산의 힘이 상호 작용하는 역동적이고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매혹적인 삼위일체"라는 종합의 일부라고 설명한다.[6]

클라우제비츠가 총력전의 지지자였다는 생각은 오해이며, 그는 "총력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고, "절대 전쟁"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논했다.[27] 실제 전쟁에서 정치적 목표를 지원하는 군사적 목표는 제한된 목표 또는 적을 "정치적으로 무력하거나 군사적으로 무력하게 만들기 위한" 효과적인 "무장 해제"로 나뉜다.[28]

파나기오티스 콘딜리스(Panagiotis Kondylis)는 레이몽 아롱(Raymond Aron)과 같은 자유주의 작가들의 해석에 반대하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에 대해 도덕적으로 무관심하고 정치가 전쟁 수행에 우선한다는 그의 조언이 평화주의적 사상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피터 파레트(Peter Paret)와 마이클 하워드 경(Sir Michael Howard)는 클라우제비츠의 텍스트를 연구하고 번역한 주목할 만한 작가들이다. 버나드 브로디(Bernard Brodie)는 ''"전쟁론" 읽기 안내''를 통해 프로이센 이론에 대한 해석을 제공했다.

존 키건(John Keegan)은 ''전쟁의 역사(A History of Warfare)''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을 비판하며, '전쟁은 국가, 외교 및 전략보다 수천 년 앞선다'고 주장했다.[29] 1950년대 미국의 억제 전략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클라우제비츠의 "절대전" 개념을 핵무기 시대에 적용하여 대량 보복 독트린과 벼랑 끝 전술을 통해 소련과 중국을 억제하고자 했다.[41]

1970년 이후 일부 이론가들은 핵확산으로 인해 클라우제비츠의 개념이 쓸모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42]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는 반란, 테러리즘, 비대칭 전쟁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등장했다. 클라우제비츠는 "비국가 행위자"의 혁명, 반란, 폭력에도 주목했으며, "소규모 전쟁에 관한 강의"를 작성하고 뱅데 전쟁과 티롤 봉기를 연구했다.[43]

마르틴 반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는 『전쟁의 변혁』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삼위일체"가 낡은 개념이며, 현대전을 위한 새로운 "비삼위일체" 모델을 제시했다.[44] 그러나 크리스토퍼 배스포드(Christopher Bassford)는 크레벨드와 키건의 클라우제비츠 삼위일체에 대한 공격이 클라우제비츠의 실제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했다.[24]

"전쟁은 다른 수단을 사용한 정책의 연속이다"라는 클라우제비츠의 금언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으며,[46] 반대되는 견해는 휴 스트래찬(Hew Strachan)과 안드레아스 헤르베르크-로테(Andreas Herberg-Rothe)가 편집한 『21세기 클라우제비츠』에 제시되어 있다.[47]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전 세계 군사 교육 기관에서 필독서로 여겨지고 있다.[48] 일부 경영 이론가들은 클라우제비츠를 참고하여 리더십 개념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다.[49][50]

4. 3. 경영 및 리더십에 대한 영향

클라우제비츠의 사상은 군사 분야를 넘어 경영리더십 이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부 경영 이론가들은 리더십 개념을 강화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의 저서를 참고하기도 한다.[49][50]

5. 저작

클라우제비츠의 저술 활동은 군 복무와 병행하여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의 초기 군사 사상은 1812년 프로이센 왕세자에게 군사학을 강의하며 작성한 왕세자 전하 진강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사에 관한 저술과 전략 연구를 지속했으며, 이러한 연구 업적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그의 대표작인 전쟁론이다.

클라우제비츠 사후, 그의 부인 마리 폰 클라우제비츠는 남편의 유고를 정리하여 1832년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장군의 전쟁 및 전쟁 지휘에 관한 유고』를 출판했다. 이 책의 1권부터 3권까지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론이다. 마리 폰 클라우제비츠는 서문에서 이 저작이 미완성 상태임을 언급하며, 친구들의 도움으로 출판이 가능했음에 감사를 표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제목내용
1806년1814년 프랑스 전역에 대한 전략 비판공격, 방어, 작전 계획에 대한 이론적 분석과 그나이제나우 및 나폴레옹의 작전 평가
1812년왕세자 전하 진강록프로이센 왕세자를 위한 군사 교육 내용 요약
1813년1813년 전역에서 휴전 협정까지
1814년1812년 러시아 전역 일부러시아에서의 군무 경험 기술
1816년-1818년전쟁론 초고
1816년-1818년1814년 프랑스 전역프랑스 전역에 대한 그나이제나우 등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견해
1816년-1818년샤른호르스트의 생애군제 개혁을 추진한 샤른호르스트의 군 경력과 특징에 대한 2부 구성 논술
1819년육군 사관학교에 관한 각서
1819년-1823년정치론집
1819년-1827년전쟁론 1-6편, 7-8편의 초고
1820년 초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역두 차례의 실레지아 전쟁 개요, 회전의 승패 요인 지적, 프리드리히 대왕의 운용 특징 분석
1824년-1825년파국을 맞이한 프로이센프로이센의 절대주의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음을 주장
1824년 이후1812년 러시아 전역
1827년-1830년전쟁론 수정
1827년-1830년1796년 이탈리아 전역나폴레옹의 회상록이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
1827년-1830년1799년 이탈리아 및 스위스 전역오스트리아군 칼 대공이 열세인 프랑스군 섬멸에 실패한 이유 분석
1827년-1830년1815년 프랑스 전역워털루 전투에 대한 전략, 작전에 관하여 지휘관이었던 나폴레옹, 웰링턴, 그나이제나우의 판단 분석
1831년정치론집


참조

[1] 웹사이트 Clausewitz and His Works https://www.clausewi[...] 201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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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과사전 Carl von Clausewitz https://www.britanni[...] 2024-02-22
[5] 서적 Clausewitz: Philosopher of War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6] 웹사이트 Clausewitz and His Works http://www.clausewit[...] 2018-07-09
[7] 서적 Marie von Clausewitz: The Woman Behind the Making of On War Oxford University Press
[8] 학술지 Five Things You Didn't Know About Carl von Clausewitz http://www.realclear[...] 2016-01-06
[9] 학술지 On the Pedagogical Intent of Clausewitz's On War 2018-03-01
[10] 문서 The Evolution of Clausewitz's Vom Kriege: a reconstruction on the basis of the earlier versions of his masterpiece https://www.clausewi[...] ClausewitzStudies.org 2019-08-01
[11] 서적 The Poetic Power of Theory https://books.google[...] V&R Unipress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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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적 On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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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서적 Clausewitz Goes Global: Carl von Clausewitz in the 21st century https://books.google[...] BoD – Books on Dem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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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서적 Clausewitz in the Twenty-First Century: Proceedings of a March, 2005 conference a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48] 서적 Social sciences and the military: an interdisciplinary overview
[49] 서적 Clausewitz Talks Business: An Executive's Guide to Thinking Like a Strategist https://books.google[...] CRC Press 2024-02-29
[50] 서적 Rebooting Clausewitz: 'On War' in the Twenty-First Centur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4-02-29
[51] 문서 Burg bei Magdeburg
[52] 문서 본인은 생일을 1780년 6월 1일이라고 믿었지만, 교구의 등기부에 따르면 7월 1일이었다.
[53] 웹사이트 Carl von Clausewitz Prussian general https://www.britanni[...]
[54] 사전 디지털대사전, 대사전 제3판 小学館, 三省堂
[55] 뉴스 전략가는 나무보다 숲을 본다 https://news.naver.c[...] 매경이코노미 2015-01-05
[56] 뉴스 증오와 적대감의 원초적 폭력성…왜 우리는 싸우는가? http://www.rapportia[...] 라포르시안 2015-08-10
[57] 문서 August von Preußen (1779~1843)는 5촌 숙부인 제5대 국왕 Friedrich Wilhelm 3세(1770 ~ 1797~ 1840)보다 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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